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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전통술박물관

제37부 우리나라의 주점

우리 나라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나타났다. 고려 성종때 개성에 처음 주점을 두고 주점에 성례, 악당등 아취있는 이름을 붙이고 문인이나 선비들이 드나드는 고급주점을 관설. 또한, 숙종때도 개경에 좌우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등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 결국 화폐통용의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것이다.

주점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역시 조선조 후기부터 농업발전으로 잉여생산이 발생하고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한 말에 이르러서는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술집, 내외술집, 색주가, 모주가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1. 헌주가

한 말의 헌주가는 2석들이 큰독 5-60개를 갖춘 규모가 큰 양조장. 주로 약주를 만들어 도매와 소매를 하였다. 1907년경의 기록에는 두 홉들이 사발로 스무잔 나오는 술독에 약주가 1원80전 백주도 1원 60전이였다. 헌주가가 서울에만 100호 정도가 있어 약주와 백주를 연간 20,000석 정도 만들었다고 한다.


2. 병주가

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해서 술을 소매하는 집. 문간에 술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바침술집" 이라고 해 놓았다. 병주가에서는 소주, 약주, 백주등은 헌주가, 소주가에서 사다 팔지만 탁주는 직접 빚어 팔았다.

3. 소주가

소주가는 소주의 제조 판매를 주로 하는 집. 서울 이남에서는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으나 서울 이북이 그 규모가 커 큰 독 7-80개에서 100개까지 갖춘 곳이 적지 않았다.


4. 주막

화폐 유통이 조선 효종 때 이후부터 정착됨에 따라 음식 숙박에 접대하는 여자도 있는 주막이 자리잡았다고 한다. 초가지붕위로 바지랑대에 용수를 높이 달아맨 집이면 주막임에 분명. 주막에는 술국자를 들고 술을 퍼주는 주파가 있어 술을 끓는물에 잠그어 거냉하여 주는 일이 소임. 시골길로 접어들면 큰 길목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어 행객의 허기를 꺼주고 갈증을 풀어 주곤 하였다.


5. 목로술집

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좁은 목판을 벌여놓고 술한잔에 너비아니나 술국등을 곁들여 파는데 값만 받는다. 목로술집에는 앉는 의자가 없어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80년전에 유명했던 선술집으로는 안국동(골탕집), 동대문밖 (큰코집) 등이 있었다 한다.


6.내외술집

남녀간에 내외한다는 뜻으로 내외술집. 보통의 가정집 대문 옆에 내외주가라고 붙여 놓은 곳은 노과부나 쇄락한 양반가의 안주인이 생계수단으로 술을 파는 곳으로, 내외술집에서는 주객들이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탕, 물, 편육등과 가양주를 준비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면 손님은 반드시 세주전자 이상을 팔아주어야 한다. 아마도 세주전자 "손익분기점"이었던 모양으로 훈훈한 인정이 느껴진다.


7. 색주가

본래는 없는 풍습. 세종대에 중국에가는 사신들의 수행원을 위로하기 위해 홍제원에 집단으로 색주가가생겼다고 한다. 그 뒤로 이를 본따 여기저기 색주가가 생겨 매주 , 매색까지 겸하였다. 이밖에도 술 지게미에 물을 부어 걸러낸 막걸리나 모주를 만 들어 파는 모주가와 여름철에 광주리에 술을 넣어 이고 다니면서 잔술을 파는 광주리 장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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